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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상과의 대화(8) - 아브라함의 천사 영접과 섬김 조회수 : 158, 2021-04-14 10:19:52
관리자
위대한 사상과의 대화(Dialogue With the Great Thoughts / 8)

창세기 18: 1-5
아브라함을 생각하라(7)-아브라함의 천사 영접과 섬김




▷ 영접 장소 / 마므레 상수리 수풀(창 18: 1)
  예루살렘 남방, 헤브론 근교에 위치한 곳으로 롯과 헤어진 아브라함이 일찍부터 정착지로 삼아 지금까지 거주해 오고 있던 지역.

▷ 시간대 / “날이 뜨거울 때에”(오정 즈음에, 케흠 하욤)
   - '때'(욤)와 '열'(하맘)이 합쳐진 말.
   - 직역하면 ‘더운 그 때에’ 곧 태양이 하늘 중앙에 치솟은 때를 가리킨다. 이때 팔레스타인 거민들은 대개 식사와 함께 잠시 휴식을 취한다(창 43: 16; 아 1: 7).

▷ 방문자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 지라”(창 18: 2)
창세기 18: 13과 19: 1에 의거할 때, ‘사람 셋’ 중 한 분은 하나님이시고 나머지 둘은 천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과 천사가 이처럼 가시적(可視的)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까닭은 어디까지나 계시(啓示) 내용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는 무형상적이며 시공간을 초월하는 초월자이시므로 그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뜻하는바 계시 내용을 유한한 인간에게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으므로 이처럼 사람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것이다.

▷ 아브라함의 영접
“눈을 들어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는 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이르되
내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창 18: 2-5)
  “달려 나가”(hurried), 아브라함이 생면부지(生面不知)의 나그네들에 대하여 적극적이고도 진실 된 사랑으로 영접한 행위이다.
여행 중에 지친 나그네를 대접하며 그들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당시 히브리인들의 관례로 굳어진 아름다운 풍습이긴 하지만(출 22: 21; 욥 31: 32; 마 25: 35; 딤전 5: 10) 이처럼 아브라함이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 나가 따뜻하게 영접한 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온 친절이자 그의 삶이 항상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는 삶이었음을 드러내 준다.
  “몸을 땅에 굽혀”(bowed low to the ground), 귀한 방문자에 대하여 갖추는 근동의 인사 양식이다.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창 33: 3), 요셉이 그의 아버지를 환영할 때(창 48: 12), 또한 선지 생도들이 엘리사를 맞이할 때(왕하 2: 15)에도 이러한 인사가 행하여졌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의 신분이나 연령 등을 묻지도 않고 이러한 예우를 표한 것은 그가 겸손한 사람이었음을 증명해 준다.
  “내 주여”,  
아브라함이 세 나그네에 대하여 단수인 ‘내 주여’(my lord)를 사용한 점은 인상적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에 의거해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나그네 중 한 사람이 하나님이심을 즉시로 깨달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주여’(my lord)라는 말이 세 사람을 총칭하는 대표 단수이며, '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도나이'는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남편(12절)이나 상전(24: 12) 또는 상대방을 높여 부르는 일반적인 의미도 함께 지닌 단어라는 점, 그리고 아브라함이 부지중(不知中)에 천사들을 대접하였다고 성경이 친히 증거하고 있는 점(히 13: 1) 등에 의거할 때 과도한 해석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후 서서히 그들의 정체를 깨닫게 되기는 하지만(17, 22절) 아직은 그들을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일반적 차원에서 존칭어를 사용한 것이다.
  “발을 씻으시고”(you may all wash your feet / 4)
중동지역은 대부분 모래와 먼지가 덮인 거친 사막 길로 되어 있다. 따라서 샌들(Sandal) 같은 간단한 신발만 신고 먼지 길을 오래 걸은 여행자들에게는 발 씻을 물이 절실히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고대 근동에서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에게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는 것이 필수 관행이 되었다.
이는 손님 접대에 있어서 최상 최적의 예우였다.
  “나무 아래서 쉬소서”(rest under this tree / 4)
‘쉬다’(ןעשׁ 솨안)은 ‘기대다, 눕다, 의지하다’는 뜻이다.
곧 나무그늘에서 휴식하며 식사하기에 편한 자세를 취하라는 의미이다. 오늘날도 옆으로 누운 자세에서 왼팔로 몸을 바치고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은 중동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식사법이다(요 13: 23).
  “상쾌하게(쾌활케)”(refreshed)
장거리 여행으로 인하여 쇠진한 기력을 힘 있게(견고케, 원기를 되찾도록) 회복할 수 있게끔 쉬라는 뜻이다.

▷ “그들이 이르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do as you say)”(창 18: 5)


▷ 아브라함의 섬김
아브라함이 방문객을 위해 준비한 섬김의 모습을 보자.
  첫째, 고운가루 세 스아로 반죽하여 만든 떡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으로 가서 사라에게 이르되 속히(quick)
고운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6)
  ‘스아’(האס 세아)는 곡물의 양 측정 단위. 1세아는 7.33l(4되).
세 스아의 밀가루를 사용했으니 약 33리터(12되) 정도를 준비함.
  ‘떡’(bread)은 일반인이 먹는 ‘떡’(빵)보다 더 고급스런 빵으로 뜨거운 돌에 구운 일종의 '펜 케이크'(Pancake)를 가리킨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보통 빵과 올리브기름, 버터, 우유, 치즈, 그리고 채소와 과일 등을 섭취했다. 빵은 밀과 보리로 만들었는데, 보리빵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었고, 밀 빵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게 사는 자들이 먹었다.
  아마도 때가 점심 식사 시간 전후였기에 아브라함의 집에는 이미 만들어둔 빵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빵을 그냥 내드린 것이 아니라 제일 고운 밀가루를 골라 정성껏 새로 만들어 가장 맛있는 상태의 빵으로 대접했다.    
둘째, 좋은 송아지
“아브라함이 또 가축 떼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selected a choice tender calf)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7).
  아브라함은 많은 송아지 중에서 대충 한 마리를 고른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시각으로 고르고 골라 가장 부드러운 육질을 가진 최상품의 송아지를 골랐다. 송아지를 잡아 요리한 하인은 아마도 아브라함 집에서 요리사 역할을 하던 분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최고의 요리사에게 최상의 재료를 건넸다.
여기서 성경 최초로 ‘요리’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NIV에서는 cooking이 아니라 prepare(밥상을 차리다, 음식을 차리다)를 사용한다.  
  셋째, 엉긴 젖과 우유
  “아브라함이 엉긴 젖(curds, 굳은 우유, 버터)과 우유와”
  엉긴 젖(뻐터)은 오늘날과 같이 우유에서 지방 성분을 추출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응고된 우유, 즉 엉긴 젖을 가리킨다.
  우유는 히브리인들의 일상 식품이다. ‘프레드 와이트’의 󰡔성지 이스라엘의 관습과 예의󰡕에 따르면, 히브리인들은 소 젖 뿐 아니라 양적, 염소젖, 낙타 젖까지 먹었다. 현재 아랍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우유는 ‘리벤’이라 부르는 것으로 ‘희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이 방문자를 대접한 것은 멋이 약간 시큼한 ‘응유’(凝乳, curdled milk)일 것이다.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 앞에 차려놓고”(8)
  유대인들의 경우 고기는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먹든 음식이다.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다른 나라 사람들을 대접할 때 혹은 잔치가 벌어졌을 때 고기를 먹었다.
물론 부자들은 더 자주 고기를 먹엇을 것이다.
솔로몬의 식탁에는 매일 ‘소고기, 양고기, 사슴고기, 닭고기’ 등 네 가지 고기 요리가 올랐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송아지 고기를 채소와 함께 차려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두 천사에게 파려낼 수 있는 최상의 식탁으로 섬겼을 것이다.

<대접>
  “나무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8)”
   아브라함은 나그네들과 같이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고, 그들이 나무 밑에서 먹는 동안 곁에 서서 시중들었다.
이것은 손님에 대하여 극진한 예우를 갖추는 행동이다.
  “그들이 먹으니라”
일부 학자들은 그들이 단지 먹는 척 하였을 뿐이지 실제로 먹은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Josephus, Philo, Jonathan).
그러나 이것은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지지될 수 없는 해석이다.
물론 영적 존재가 육적인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수행 천사가 기꺼이 음식을 드신 것은 아브라함의 마므레의 천사 영접과 환대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다는 점을 일깨운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보다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마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신 것(눅 24: 41-43)과 같은 이유이다.

▷ 하나님의 축복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내년 이 맘때 내가 반드세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여호아께 능하지 못할 일이 있겠느냐”(창 18: 9-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아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 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이 태어날 때에 백세라”(창 21: 1-5).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I will rejoice in doing them good and will assuredly plant them in this land with all my heart and soul / 예레미야 32: 41)

▷ 환송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When the men got up to leave, they looked down toward Sodom, and Abraham walked along with them to see them on their way / 창 18: 16)
  “소돔으로 향하고”, 직역하면 '소돔 쪽으로 얼굴을 향하고'.
마치 심판주 하나님께서 왼편에 있는 저주받을 자들에게 얼굴을 향하듯(마 25: 41) 심판을 위한 진노의 얼굴을 소돔 쪽으로 돌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브라함이 기거하고 있는 헤브론 지경에서 소돔까지는 약 30km정도의 거리로 멀리 내려다 볼 수 있는 지점이다.
  “함께 나가니라”
유대전승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일행들과 함께 헤브론 북동쪽에 있는 ‘카퍼바누케’(Capherbanuche)까지 동행했다.
이곳은 아주 높은 언덕에 위치한 지역으로 그곳에서 내려다보면 사해와 그 연변의 여러 성읍들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의 방문자들을 즐거움으로 섬겼다.
아브라함은 철저히 섬겼다.
아브라함은 성실함으로 섬겼다.


❚ 아브라함의 섬김과 축복 / 창세기 18: 1-15, 히브리서 13: 1-2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도 있느니라”(히 13: 1-2)

  창세기 18장에 의하면, 이삭의 잉태 소식을 전해준 하나님의 천사는 세 명의 손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하였다.
아브라함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은 다음 이들은 이삭의 잉태와 출생 소식을 알려주었다.
사라를 통하여 아들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분명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위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려할 신뢰의 문제였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는 25년이라는 양적인 시간(크로노스)이 지나가고 아들을 낳게 되는 성취의 질적인 시간(카이로스)이 다가왔다.
  왜 이삭의 출생 소식이 손님접대와 밀접하게 연관되었을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성숙한 모습이 손님을 접대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막이나 광야에서 생활하는 유목민들에게 나그네 접대는 무엇보다 우선하는 사회관습이었다. 사막과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나그네는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그네에게 사막 유목민들의 환대는 생명 보호를 위한 기본적 사회 안전 시스템이다.
  성경이 소개하는 아브라함의 손님접대는 특별하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들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히브리서 13: 2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접대한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평상시에도 그가 손님을 그렇게 대접하였음을 보여준다. 곧 그의 손님 접대는 성숙한 신앙과 인격의 외적 표현이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나그네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확대된 것이다.  
  창세기 8장에 따르면, 손님들은 예고도 없이 방문하였다.
아브라함은 손님들에게 달려가 몸을 땅에 굽힌 자세로 영접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 잠시 쉬어갈 것을 강권하였다.
아브라함은 시종일관 손님을 주인처럼 대하고 자신은 종처럼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주'라고 불렀으며,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그들 곁에 서서 시중을 들었다.
아브라함은 고운 가루로 떡을 만들게 하고 기름진 송아지로 요리를 준비시켰다. 고운 가루로 만든 떡이나 살진 송아지 고기는 당시 최고의 음식이었다. 손님들을 겸손하고 친절하게 접대하는 자세 속에서 그의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어느 면에서 아브라함의 그런 모습이 있기 까지 하나님은 이삭의 출생을 지연시키신 것이다. 성경은 이삭의 출생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창세기 21: 1-2에는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아들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것은 이삭의 탄생이 자연적인 과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놀라운 성취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아브라함이 그동안 지켜온 믿음과 인내에 대한 보상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는 '웃음'이란 뜻이다. 아들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모두 '웃음'으로 받아들였다(창 17: 17; 18: 12) 그때의 웃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부정적 웃음이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지나친 격차로 생겨난 공백을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웃음을 즐거움의 긍정적인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다. 이삭의 탄생은 아브라함에게 믿을 수 없는 기적적인 놀라운 성취이며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라도 이루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여준 놀라운 사건이었다.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희망과 가능성으로 존재하신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 9: 48).
아브라함은 그의 집을 방문한 자들을 정성껏 환영하고 섬겼는데,
바로 그 분들이 하나님의 천사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한다. 성경이 줄기차게 강조하는 섬김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되새기자.  
✪ 섬김의 신앙
  1. 세계 2차 대전 때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었다.
각 지방의 젊은 청년들은 군의 징집영장을 받은 후 큰 도시로 집결해서 기차를 타고 훈련소로 갔다. 당시 국민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장정들을 태운 기차는 주로 밤늦게 떠났다.
그러므로 워싱턴의 유니온 기차 정거장에는 밤마다 수백 명의 장정들이 몰려들었고 시민들이 나와서 장정들의 편의를 도와주었다.
그 자원봉사자 가운데 밤마다 밤늦게까지 다리를 절면서 뜨거운 코코아잔을 쟁반에 들고 젊은 장정들에게 봉사를 하는 분이 있었다. 어떤 때는 임시로 마련된 주방에서 친히 코코아를 끓이기도 했다. 어느 장정 하나가 그 노인을 자세히 보니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대통령이었다.
“각하.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니십니까.”
루즈벨트 대통령은 육체적으로 자유스런 사람이 아니었다.
육체의 불편을 무릅쓰고 밤마다 기차 정거장에 나와 기차로 떠나는 청년들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들고 다니며 봉사했다.
대통령이 친히 기차 정거장에 나와서 따라주는 코코아를 마신 청년들의 사기는 대단했다. 이처럼 섬기는 일에 위아래가 없다.
  기적 소리가 화력 기차를 움직이지 않는다.
뱃고동 소리가 기선을 밀어 주지 않는다.
기차는 피스톤이, 배는 스크루가 움직여 준다.
기차의 피스톤과 배의 스크루 뒤에는 검은 화부가 석탄 가루와 기름에 덮여 있다.
  유람객으로 타고 있는 우리들은 생각해 보았는가?
단 한 번이라도 그 화부에 대해 고마워해 보았는가?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가 나무를 키우는가, 아니면 땅에 묻혀 있는 뿌리가 키우는가? 연꽃에 앉아 너울거리는 나비가 연꽃을 길렀겠는가, 아니면 진흙에 묻힌 그 뿌리겠는가?
대답하기 전에 깨달아지는 것이 없는가!
  흔히 힘든 일과 긴요한 사명을 통해 봉사를 하는 사람은 모양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별로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대우도 제대로 해주지 않는다. 반면에 남의 공로를 가로채고 자기 공로를 선전하고 제 모습 자랑을 잘하는 사람은 남에게 인정을 받고 세상이 그를 알아준다. 그러나 세상이 유지되어 가는 것은 이런 사람 때문이 아니라 음지에서 양지를 조성하는 바로 숨어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말없는 봉사 섬김 덕분이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겸손히 가정과 국가와 교회를 섬기는 각 처소의 음지 가운데 거하는 성도들은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쇼를 펼치는 화려함보다 참으로 고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2. 성도가 섬기고 봉사해야 할 이유
  * 예수께서 스스로 본을 보이셨으므로(마 20: 28; 요 13: 14-15)
  * 복음 전파를 위해(행 21: 19)
  *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행 21: 20; 고후 9: 13)
  * 봉사에 따른 상급이 예비 되었으므로(고전 3: 7,8; 골 3: 24)
  * 성도는 그리스도의 일꾼이므로(고전 4: 1-2)
  * 봉사의 직책을 받았으므로(고후 9: 12)
  * 받은 바 구원에 감사하기 위해(고후 9: 12,15)
  *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엡 4: 12)
  * 옛 성도들도 했으므로(빌 2: 17)
  * 육체를 신뢰하지 않으므로(빌 3: 3)

3. 섬기고 봉사하는 자가 받을 상급
  * 생명을 속함 받음(출 30: 16)
  * 천국에서 큰 자로 여겨짐(마 5: 19)
  * 더 큰 일이 맡겨짐(마 25: 23)
  *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함(마 25: 23)
  *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음(요 12: 26)
  * 하나님께 영광돌림(행 21: 19-20)
  *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음(롬 14: 18)
  * 사람에게 칭찬받음(롬 14: 18)
  * 하나님의 상을 받음(고전 3: 7-8)
  * 성도의 부족을 채움(고후 9: 12)
  * 그리스도의 몸을 세움(엡 4: 12)
  * 유업의 상을 받음(골 3: 24)
  * 영광의 면류관을 받음(벧전 5: 4)
  * 영원한 복 가운데 거함(계 7: 15-16; 22: 3)

4. 섬기고 봉사할 것을 명하시는 말씀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great)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servant)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first)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slave)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not come to served, but to serve)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 26-28).
↠ 종이 되는 길이 으뜸이 되는 지름길이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 26)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할지어다”(시 2: 1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빌 3: 3)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벧전 4: 11)

5. 교회의 봉사 의무
  구원받은 성도의 모임인 교회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본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께서 그 영광된 자리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사람과 같이 되셨으며, 또 자신을 모든 사람의 대속물로 내어 주사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섬김의 도를 다 행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모임인 교회도 세상을 향하여 또 교회 각 구성원들을 향하여 봉사의 의무를 다 행하여야 한다.
  교회의 봉사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첫째, 영적 봉사.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서 출옥 후 바로 형제를 찾아가 위로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만나보고(met) 위로하고(encouraged) 가니라(then they left)”(행 16: 40). 이처럼 영적 봉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병든 자, 절망에 빠진 자를 찾아가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하는 것이다(고전12: 9, 30).
둘째, 물질적 봉사.
물질적 봉사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며 도우는 것을 말한다(고후 9: 9).
  오늘날 교회도 이러한 봉사의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널리 퍼뜨릴 수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그분을 경배하며 봉사와 헌신을 다하는 삶을 어찌 우리의 자랑이라 할 수 있겠는가.
즐거움으로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의 천사를 대접했던 아브라함과 같이 그것은 단지 우리가 해야 할 감사의 표현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 16: 27).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the crown of life)을 네게 주리라”(계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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